깐치멀은

마을소개

마을소개
깐치멀마을은 주박장아찌(큰참외-일명 나라스케) 그리고 무공해 야채를 생산하고 있는 마을로써 예로부터 전통이 살아 숨쉬는 마을로 까치의 형상을 닮아서 깐치멀(까치마을)이라 불렸고 이 깐치멀은 까치 작(鵲)자인 작촌마을과 구작마을로 이름이 바꾸어 까치멀의 얼을 이어 받으면서 모여 있다.
또한, 예전에 이곳은 바다로 둘러 쌓여 있었다고 한다. 꼭, 섬처럼 보였는데, 그때 까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깐치멀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산면
성산면은 군산시 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면적 27.52㎢, 인구 3,283명(2016)있고 면의 중앙에서 남북방향으로 편마암을 기반암으로 되어 있으며 오성산, 망경산등의 해발고도 100~200m의 산지가 분포하며, 그 주변에 둔덕들과 수림평야가 펼쳐져 있다.
마을의 주요 농산물은 시설야채와 큰참외, 쌀농사 등으로 이루어진다. 서해안고속도로가 남북으로 지나고 군산 톨게이트가 위치해 있으며 남부로는 국도 27,29호선이 지나고 있어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 지역으로 교통접근이 양호하고 면의 서쪽 끝에 금강이 흐르고 있는 성산면은 옛임피군의 지역으로서 임피읍내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북일면이라 불렸고 16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폐합에 따라 14개동리와 남산면의 덕봉리 일부를 병합하여 성산면이라하여 옥구군에 편입되어 9개리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73년 7월 1일 내흥리를 군산시에 넘겨주었다가 1995.1월 1일 군산시와 옥구군 통합으로 군산시 성산면이 되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군산
군산은 본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으며, 삼국시대 때에는 백제가 마한을 합병하여 백제국의 소속으로 마서량 또는 미사현, 부부리현이라 칭하였다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에는 옥구현으로 칭해졌다.
고려시대 현종 6년에 옥구현의 이웃에 있던 임피현에 예속되었다. (우왕 6년(1380년) 금강에서 왜구 5백척의 선박을 최무선 장군의 화포로 격멸)
조선시대에는 태조 9년에 해군 요새지로 병마사 관직을 두어 현의 행정을 겸하였다. 세종5년에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바꿔 그 후 다시 현감을 두었다.
일제시대인 1895년 옥구현이 옥구군으로 임피현이 임피군으로 개정되었고 1906년 10월 01일 칙령 제48호(1906년 9월 24일 공포)로 옥구군이 옥구부로 개칭되고 전라북도 경찰서 옥구분파소 설치 (1908년 군산경찰서로 개칭)되었다. 벚꽃축제로 유명한 전군가 도로는 1907년 전국에서 최초로 전주가도(지금의 번영로)포장공사 시행(폭 7m, 길이 46.5km)되었다. 1910년10월 01일 칙령 제7호(공포)로 군산부가 창설되고 옥구부는 옥구군으로 개칭되었다가 해방 후 1949년 08월 15일 법률 제32호로 군산부를 군산시로 개칭되어졌다.

성산면 변천사
옥구군 1읍, 9면의 하나. 본래 임피군의 지역으로서 임피 읍내 북쪽이 되므로 북일면이라 하여 16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상북면의 14개 동리와 남산면의 덕봉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성산의 이름을 따서 성산면이라 하여, 옥구군에 편입되어서, 내흥, 덕성, 둔덕, 고봉, 도암, 여방, 대명, 창오, 산곡의 9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2호에 의하여 내흥리를 군산시에 넘겨 주어서 현재 8개 리가 되었다.
동쪽으로는 나포면과 임피면, 남쪽은 대야면과 개정면, 서쪽은 군산시, 북쪽은 나포면과 금상 건너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마서면과 마주하고 있다.

성산면에 진성창지
진성창은 창오리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 창오초등학교 서쪽 논두렁에 우람한 버드나무가 가지를 넓게 받쳐들고 있다. 성산면사무소 소재지에서 ‘다리실래’를 훌쩍 넘으면 곧 창오리다. 여기에 정자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1724년 (조선 영조 초) 이석장씨가 이룬 마을이고 버드나무는 그 때 심은 것이라 전한다. 이씨는 3천섬의 큰 거구였다. 조창의 망경산에서 이어 연봉을 이루고 있는 고봉산의 남쪽 기슭이다. 이씨는 토호였다. 가짐새나 그 위엄이 따른 장중한 토호였다고 전한다. 특히 전라감사 이서구씨와 각별한 교분이 있었다. 한다. 이씨 집터에서 북쪽 산기슭에 창안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진성창지다. 고려 12조창 중의 하나였다. ‘창안(倉雁)’은 원래 ‘창안’ 이를테면 ‘창(倉)의 안쪽’이라는 이름이었던 것이 한자로 정리하면서 엉뚱하게 창안(倉雁)이라 붙은 것이다.

오성묘(五聖墓) 전설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 김유신 장군과 연합해서 30만군대를 이끌고 백제군을 치기 위하여 군산 앞바다 천방산 기슭에 이르자 갑자기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상륙하여 천방산(千房山) 계곡에 오르니 천방사란 사찰이 있어서 찾아가니 한 도승이 있었다. 소정방이 칼을 뽑아 들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도승더러 네가 우리를 방해하기 위해서 도술을 부려 안개가 끼게한 게 아니냐면서 목을 치려고 하자, 안개가 그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소정방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금강을 거슬러 오르자 다시 안개가 끼어서 한치의 앞도 헤쳐 나갈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배를 연안에 정박해두고 산에 올라가 보니, 다섯사람의 신선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소정방은 선인들에게 달려들어 너희들이 도술을 부려서 안개를 끼게 한게 아니냐면서 칼을 뽑아 들고 목을 치기 전에 안개를 거치게 하는 비법을 알려달라고 호동을 쳤지만 끝내는 묵묵부답으로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이 때 괘씸스럽게 여긴 소정방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내려치자 다섯 성인은 장렬하게 죽고 말았다. 인근 성산 주민들은 시신을 거두어 묘를 써주고 그 넋을 위로해 주는 뜻에 추모비를 세우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주고 있으니, 그 이름을 일러서 오성묘라고 한다.

채원병씨 집에 얽힌 전설
●옥구군 성산면 고봉리, 채원병 (남. 38세 ). 1989. 8. 20., 박순호 조사
옥구군 성산면 고봉리에는 호남지방에서는 상류가옥(上流家屋)의 전형(典刑)이 될 만한 채원병씨의 집이 있다. 여기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고봉산의 지맥(支脈)이 지네와 같은 형상을 오공혈이라 했으며 그 혈맥이 바로 채씨 집으로 흘러서 채씨 집의 중앙부가 지네의 어금니에 해당된다고 믿는 것이다.
이 집터를 지정해 준 도승은 이곳이 오공혈로 되었으며 지네는 불빛을 만나면 움직이지 않는 바 오성산과 봉우재(봉화대가 있는)가 집터와 마주보고 있는 산이어서 집안의 행운이 계속되리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지네는 숲에서 사는 생물이므로 항상 그늘을 만들어 주어야 하니 가옥의 전면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수구막을 삼도록 하라고 권하였으며, 이 집터의 대문채 전면에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이것도 지네의 목이 마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도승의 말에 주인이 이 집터에다 집을 지으면 몇 대나 흥할 것인가를 묻자 도승은 봉우재를 가리키면서 저 봉우재의 봉화가 꺼질 때까지는 계속하리라고 하였는데 현재는 봉우재의 봉화는 꺼져 버렸지만 고봉산에 미군기지가 건설되어 밤이면 불이 휘황하다.
따라서 이 집 사람들은 이 집이 언젠가는 또 다시 예전처럼 흥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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